조이의 글들/만들어 낸 이야기

미시간 호수로 지는 해 - 4

doggya 2012. 3. 20. 03:01

그 다음 날로 비행기 예약을 마쳤다. 그리고 사흘 후면 영준이라는 우유부단하고 더러운 인간을 인계하러 가게 되어 있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 아침이었던 거다.

 

한 참 전에 한 회사에 근무하는 유부녀와 주차장 한구석 어두운 차 안에서 뒤엉켜 있는 걸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현정은 영준을 떠날 것을 심각하게 생각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 무능력하고 소심한 남자를 떠나겠다고 선고하는 건 길거리에 버리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좀 더 능력 있고, 부자였다면, 벌써 버린다는 죄의식 없이 떠날 수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수가 있다. 가정을 지켜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현정은 부모가 다 있는 가정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웠다. 그래서 정말로 지키고 싶었다.

 

돌아 눕는지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현정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고개를 돌려 영준을 바라 보았다. 죄수처럼 감시를 당하며 침대에 누워있는 영준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이젠 분노도 연민도 그리고 물론 사랑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남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현정은 가족의 행복이 곧 자기의 행복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가족 속에 자기 자신이 융해되어 없어짐으로써 행복이 오는 거로 생각했었다. 그러기에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불평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행복과 사랑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사랑이란 게 대체 뭔데? 타이타닉의 러브스토리같이 누군가를 위해서 내 목숨도 희생할 수 있는거? 콩 반쪽 나눠 먹는 것도 부족해 다 내주어도 아까운 것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사람? 과연 세상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결국은 사랑도 결혼도 사람 사이의 계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현실이다. 그걸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처음으로 한심스러워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현정은 전화기를 찾았다.

 

늦여름의 파란 하늘은 참으로 상쾌하게 보인다. 현정의 참담한 마음 같은 건 아랑곳도 없다. 현정의 마음을 씻어주기 위해서이기라도 한 양, 조금 전에는 한바탕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언제부터인가, 현정은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누구와 약속이라도 지키려는 사람처럼 어김없이 호숫가로 나오곤 했었다. 가끔은 피터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주지 않겠냐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호수 끝에서 같은 색깔로 이어지는 푹 젖은 하늘은 현정의 마음을 언제나 조용히 가라앉혀 주었다. 자기의 마음보다도 더 어두운, 더 무거운, 더 슬퍼서 몸에 있는 액체를 모두 온 세상에 퍼붓고 있는 하늘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호숫가 돌 위에 앉아 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결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

‘너, 영준을 사랑하니?’
현정은 자신에게 묻는다.

‘몰라, 옛날에는 그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지금 말이야. 아직도 사랑하냐고?’

모른다. 정말로 모른다. 아직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하는 이것이 사랑인가? 그렇다면 그런 사랑은 고만 하고 싶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현정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옆에 조용히 앉는다. 힘들 때마다 상담역을 완벽하게 잘 해 주었던 피터였다.

"많이 힘들지?"
"……."

"괴로우면 아무 말 안 해도 돼. 그냥 앉아 마음을 좀 정리하고 가도록 해."

현정은 며칠 전 잠시 엘에이에 갔다 와야 하는 이유를 피터에게 간단히 전화로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피터는 이혼할 것을 권했었다. 대답도 못 했고, 지금은 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생각도 없이 그냥 여기서 만나자고 아까 병원에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이혼……."

순간 하늘을 닮은 피터의 파란 눈이 빛나는 것을 현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아직은 안 할 거야. 물론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게 안 된다면 처절하게 복수해 주고 싶어."

"……."

잔뜩 긴장하고 귀를 기울이던 피터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순간 피터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며 현정을 말을 이었다.

"사랑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 마음은 이제 영준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졌거든. 영준은 나에겐 이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 단지 인수의 아빠일 따름이야. "

현정의 어깨를 잡고 있는 피터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현정은 호수를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하늘은 닮은 피터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혼할 수는 없어. 지금까지는 아무리 화가 나도 영준이 한 것처럼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이젠 그 생각이 바뀌었어.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한 가닥 자존심이 나를 지켜 왔지만, 너를 기다리면서 그거 호수에 던져 버렸어. 되돌려 주겠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내가 보냈는지를 알게 해 주고 싶어. 영준의 심장을 찢어 놓고야 말겠어. 혹은 그 후에 떼어 내도 늦지 않을거야 "

그때, 현정은 하늘 중간에 떠 있던 해가 미시간 호수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그 뜨거운 열로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물을 보았다. 삭힐 수 없는 자신의 분노처럼.

 

“내가 아는 넌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아니,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넌 악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잖아. 난 그걸 알아.”

조용한 피터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마치 봄비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현정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잔잔하게 비를 뿌려준다. 이때 현정의 어깨를 감싸 안은 피터의 팔에 힘이 주어지며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는 것을 현정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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