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던 에이즈병동은 다른 병동에 비해서 남자 간호원들이
비례적으로 많은 곳이었다.
물론 그들 중 많은 숫자가 게이(Gay, 동성연애자)였다. 하지만 모두다 그런 것만은 아니었는데,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게이간호원중 한사람의 아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이다.
당시는 에이즈가 한창 창궐하던 때라 우리 병동의
환자들은 거의가 Frequent Flier(단골손님)들이었다. 환자들은 합병증이
더했다 덜했다하는 바람에 계속 병원을 들락날락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이런 단골손님중에 마치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던
환자가
하나 있었다.
31살의
나이보다 아주 어리게 보이는
옅은 갈색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의
빌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어느
한가한
날
저녁, 아무도 없는 널싱스테이션에
혼자
앉아
환자일지를
쓰고
있는데, 며칠전
퇴원한 빌리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항상 앰블런스를 타고 들것에 실려왔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걸어서 오지? 더구나 날기라도 할 듯 가벼운 걸음걸이는 전혀 환자같이 보이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한 채 같은 병동의
간호원인 게리의
손을 꼭
잡고 걸어오는게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금방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헤이,
죠,
짐작해봐,
좋은
뉴스가
있어”
”어?
알았다.
니네
둘이
사랑하는
거지?”
”그래, 방금전에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 둘이
함께
살기로
결정했어.
그리고는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줘야
할 사람이
너라고
생각했기에 온거야.”
물론
게리는 에이즈
환자도
아니었으며,
그 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기에 쇼크에 가까운 놀람이었다. 또한 에이즈는
세상사람들을 공포로 몰고갔던 전염성이
강한
저주
받은
병이며,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리가 아닌가? 무척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기쁜마음으로
두
사람을
껴
안았다.
아니, 껴안았다기 보다는 두 남자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형상이었지만 축하한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결정을 내린 게리의 용기에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었다.
’이런 사랑이 이 세상에 진짜 존재하는구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빌리는 이미
그때 길어야 일년정도나
살까말까하는 시한부의
상태였다. 그러나 항상 밝은 얼굴에 천년을 살 것 같은
태도를 가진 빌리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곧 죽을 사람이라는 걸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긍정적인 태도로 매일매일을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되면서,
빌리가 병원에 입원하는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게리가 잘 보살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랑의 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친구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 그리고 얼마후에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빌리의 병세가
호전되어
미술관에
취직했다며,
그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어린애같이
좋아하면서
또
찾아왔었다.
두사람은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참
행복하게
살았다. 얼마남지 않은
일초일분을
아껴가면서,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상당히 내성적인 게리였지만 파티를 좋아하는 빌리를
위해서 집에서 파티도 자주 열어주고, 건강이 허락할때는 빌리가
원하는 곳으로 여행도 가면서 온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쳤다. 전에는 그렇게 많이 하던 오버타임도 딱
끊고, 완전히 빌리를 위해서 사는 게리를 보면서 한편으로 흐뭇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마음 한구석으로 스며드는 슬픔을 미소로 덮어두어야만 했었다. 빌리가 작별을 고해야할 때가 오면 게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게리를 볼때마다 우린
시한폭탄옆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한 6개월이
지났을까? 게리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빌리는 차츰 병원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침반이었던 게리는 일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나머지 시간을 모두 빌리의 간호에
바쳤다. 오랜 병고로 인해서 혈관이 모두 숨어버려 혈관을 찾기가 힘들때는 다른 간호원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주사바늘을 찔렀고, 의식이 없어 소변을 못 보고, 장염으로 하루종일 설사를 해 댈때도 감염의 위험이 있다며 Catheter(소변을 뽑아내는 관)를 삽입하는 대신 대소변을 다 받아내는 게리의 정성어린 간호는 모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빌리는 게리의 팔에 안겨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행복하게 저
세상으로
갔다.
우리는 모두 게리가 장례식후에 휴가신청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다시 일하러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곤 오리려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하는 우리를 위로하기에 바쁜 게리를 보며 또 한번 눈물을 흘려야했다.
어느날 게리와 같이 일하는 기회가 있었을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빌리가
곧 이
세상을
떠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면
네
마음에
남을
상처를
알면서도
그런
길을
택한
이유가
뭐였니?
아무리 사랑의 힘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너의 목숨까지 위협을 받아가면서 빌리를 택한 이유가 뭐였니?”
난 정말로 궁금했다.
만약 내가 게리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죠,
사람은
어차피
세상살면서
상처를
받게
되어
있잖니?
거기다 하나쯤
더
받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니?
만약
우리가
그때
그런
용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 후회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받고
있을거야.
난
행복해. 빌리는 그렇게 떠나고 지금
없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함께했던 시간들 , 그리고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추억과
함께
살아있어.
아니, 영원히 살고 있을꺼야. 내가 너 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기회가 왔을때는 주저없이 잡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거야.
사소한 이유로 그냥 스쳐지나게 한다면, 너는 아마 오랫동안 후회를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할꺼야. “
난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이기적인
수식어이며, 시한부로써, 다만 종족번식을 위한 전위행위일 뿐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의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
자신이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빌리와 게리를 통해서, 그 가슴아픈 사랑을 보면서 진실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고, 나도 그런
사랑을 찾는 여행을 떠나 봐야겠다고 몇년째 준비만 하고
있다.
(한국육필시인협회 2005년 사화집 ‘산고랑에 흐르는 실개울 물소리’ 게재)